서울 을지로 281번지, 이곳은 조선시대 군인들이 훈련하던 하도감 터였습니다. 1925년 일본이 성벽을 부수고 ‘경성운동장’을 만들었고, 광복 이후 ‘서울운동장’을 거쳐 1985년 ‘동대문운동장’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80여 년간 서울 시민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던 공간은 2007년 철거되었고, 2014년 3월 은빛 물방울 모양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완공 12년이 지난 지금, 건물은 다시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최근 여당 의원이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며 ‘DDP를 없애고 아레나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거대한 공공건축물이 주변 지역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국 패션 산업의 중심, 동대문
지난 동안 동대문은 끊임없이 변해왔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이 있던 시절, 이곳은 체육 공간이자 주변 상권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물류와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2014년 문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건축물로서의 명성은 얻었지만, 동대문만의 독특한 상인 문화와 물류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특히 소매 상권이 급격히 줄어들고, 이곳 의류 산업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도매 생태계가 소외되면서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건물은 45,133장의 알루미늄 패널이 각기 다른 각도로 빛을 반사하며 ‘환유의 풍경’이라 불립니다.
사라진 공간의 유연성
1926년 개장한 동대문운동장은 1980년대 중반까지 ‘성 동쪽 너른 들판’이라는 뜻의 ‘성동원두’로 불리며 수많은 경기가 열렸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시설이 낡아 운동장 기능은 약해졌지만 오히려 주변 패션타운과의 연결은 강해졌습니다. 경기가 끝난 운동장은 주변 도매 상가들을 위한 거대한 물류 공간으로 쓰였습니다.
30년 넘게 동대문에서 의류 도매업을 해온 박중현 동대문패션타운관광특구협의회 회장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예전 동대문운동장 광장은 수천 대의 오토바이와 화물차가 드나드는 하역장이었습니다. 경기가 열리는 밤늦게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주변 상가로 스며들어 상권과 어우러지던 구조였습니다.”
자정이 넘으면 시작되는 진짜 동대문
자정이 넘은 심야 시간, 불이 꺼진 DDP 너머 풍경은 치열한 생존의 현장입니다. 물류 차량이 머물 합법적인 공간이 사라진 도로 위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차량과 오토바이가 위태롭게 뒤섞입니다.
제대로 하역장 하나 없어 길바닥에 물건을 산더미처럼 쌓는 ‘노상 적치’는 이곳의 암묵적인 질서가 오래입니다. 사람 키만 대형 비닐봉투를 산처럼 쌓은 수레가 곡예하듯 인파를 뚫고 지나가고, 좁은 틈새로는 자기 몸집보다 짐을 짊어진 사람들이 없이 오갑니다.
박 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 도매 상권 종사자만 10만 명에 달하고, 오가는 돈의 규모는 보수적으로 잡아도 연간 6조 원입니다. 그중 중국 수출 물량만 수조 원에 육박할 정도로 막대합니다. 하지만 정부는 오래되고 독특한 이곳의 거대 산업 생태계를 철저히 외면한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엇갈린 시간, 단절된 공간
서울시가 강조하는 연간 1,700만 명, 누적 1억 2,600만 명의 방문객 수치는 DDP가 문화 랜드마크로서 지닌 압도적인 집객력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화려한 통계는 동대문 패션타운의 진짜 주인공인 도매 산업의 리듬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DDP의 주요 시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운영되는 반면, 동대문 패션타운의 경제를 떠받치는 도매 상권은 11시부터 다음 새벽까지 활성화됩니다.
산업 현장이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심야 시간대, DDP는 모든 기능을 멈춘 거대한 ‘어두운 섬’으로 남겨집니다. 야간에 활동하는 10만 명의 도매 상인과 종사자들에게 DDP는 이상 함께 쉬는 파트너가 아닙니다.
2007년 DDP 설계 공모에 참여했던 조성룡 건축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동대문에는 그곳을 기반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시민들이 수십 년간 일궈온 독특한 형태의 산업 생태계가 있습니다. 공공 건축이 지속성을 얻으려면 자리에서 공간을 이용하는 지역 사람들의 삶과 이로운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는 이어 강조합니다.
“이제라도 ‘누구를 위한, 그리고 누구에 의한 디자인센터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단순히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조형물 하나를 세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DDP와 동대문패션타운 사이로 장충단로가 가로지릅니다. 이곳 상인들은 DDP를 기준으로 소매상가가 모여 있는 서쪽을 ‘서편제’, 도매상가가 모여 있는 동쪽을 ‘동편제’라 부릅니다.
인디언에게는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