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거인의 운명적 출발
1963년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특별한 해였습니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2년이 지난 시점, 군복을 벗은 사람이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민주공화당 후보로 나선 그는 12월 제5대 대통령이 되었고, 이후 16년간 이어질 집권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한편, 국회에 입성한 신예 정치인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뒤인 11월 26일,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습니다. 전남 목포에서 출마한 야당 후보가 드디어 당선의 기쁨을 맛봤습니다. 그는 과거 번이나 선거에서 떨어졌고, 번은 당선됐지만 쿠데타로 의원 자격을 잃은 아픈 기억이 있었습니다. 오랜 좌절 끝에 얻은 값진 승리였습니다.
12월 17일, 대통령 취임식과 같은 국회가 문을 열었습니다. 새로 당선된 의원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의정 활동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철저한 준비로 무장한 질문 공세
그는 국회 도서관을 가장 자주 찾는 의원으로 유명했습니다. 본회의나 위원회에서 발언하기 전에는 반드시 철저히 공부하고 준비했습니다. 여론의 반응까지 꼼꼼히 살펴본 질문에 나섰습니다.
정부 각료들을 향한 그의 날카로운 질의는 유명했습니다. 국무총리와 장관들이 그의 질문 앞에서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일이 잦았습니다. 당시엔 텔레비전 중계가 없었기만, 청와대까지 유선으로 연결해 국회 상황을 직접 들을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각료들이 야당 의원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듣고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장관들이 어째서 사람도 당해내지 못하는가”라며 질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뜨거운 논쟁
하지만 의원은 무조건 정부를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문제였습니다. 야당과 학생, 시민들이 격렬히 반대했지만, 그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다만 합리적인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과의 회담은 원래 1951년 이승만 정부 시작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권유로 시작된 협상이었지만, 과거사 사과 문제와 보상금 규모를 놓고 의견이 엇갈려 진전이 없었습니다.
경제 발전의 밑천을 찾아서
쿠데타 세력은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받을 보상금에 주목했습니다. 과거 만주와 일본에서 활동했던 인맥이 일본 정계와 재계에 폭넓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믿는 구석이었습니다.
당시 정보기관 수장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자본이 필요한데, 돈이 나올 곳은 일본 보상금밖에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습니다.
1961년 11월,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일본에 들렀습니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고, 회담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보상금에 성의를 보이면 우리도 해양 주권 문제에서 유연하게 대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보상금이 핵심임을 분명히 것입니다.
하지만 보상금 액수를 놓고 양국의 입장 차이는 여전히 컸습니다. 한국은 최소 8억 달러를 원했지만, 일본은 3천만 달러도 어렵다는 입장이었습니다.
1962년 10월, 비밀 협상 끝에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 수출입은행 자금 1억 달러 추가 지원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격렬한 반대 외로운 목소리
1964년 3월, 같은 내용이 공개되자 야당과 시민사회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습니다. 제1야당 대표는 결사 반대 입장을 밝혔고, 200여 명이 모여 반대 투쟁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는 나라를 다시 팔아먹는 것”이라는 구호가 넘쳤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야당 의원이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예 의원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야당 모임에서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필요하다.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어야 하며,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협상이라면 반대해서는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북한, 중국, 소련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일본까지 적으로 돌릴 없으며, 경제 발전을 위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미룰 없다고 봤습니다. 식민지였던 많은 나라들이 과거 종주국과 다시 국교를 맺고 있다는 사실도 언급했습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일본의 힘을 활용해야 하며, 관계 정상화를 미루면 세계의 흐름에서 고립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그러자 야당 주변에서 “그는 여당의 첩자다. 변절자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당시 야당 의원에게 변절자 딱지가 붙으면 정치 생명이 끝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가 여당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소문이 수표 번호까지 붙어 퍼졌습니다.
신념과 소신을 지킨다는 것, 그것은 때로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