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탄광촌의 기억, 그리고 지금
10년 전, 인기 방송 프로그램에서 유명 연예인들이 강원도의 탄광을 찾았습니다. 미터가 넘는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기와 완전한 어둠 속을 묵묵히 견디며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뒤, 88년이나 이어온 광산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석탄이라는 에너지원 자체가 이미 옛날 것으로 여겨졌고,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장’이라는 말만은 살아남았습니다. 원래는 갱도의 가장 안쪽, 최전선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이제는 ‘수준 이하’, ‘저질’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런 표현을 쓰면 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들립니다.
한 가족의 이야기로 시대의 흐름
문화평론가인 작가가 광산에서 일했던 아버지를 중심으로 가족의 역사를 기록한 ‘쇳돌’을 펴냈습니다. 책은 가족이 일자리를 찾아 이동했던 과거, 광부들의 육체적 고통, 여러 지역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변화한 광산의 오늘날 모습까지 폭넓게 다룹니다.
작가는 여러 인터뷰와 자료는 물론, 당시 문학작품과 국내외 예술작품들까지 끌어와 시대를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서 당시 우리 사회가 가진 구조적 문제와 편견까지 짚어내는 것입니다.
640쪽에 달하는 책은 광산의 문제를 마치 일처럼 느끼게 만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가 본인은 오랜 시간 광산과는 무관하게 살았습니다. 친구들 부모가 광산에서 일한 사람은 명도 없었을 정도입니다. 지방 노동계층의 삶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했던 부모님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원치 않았던 인생의 길
작가의 아버지는 광부가 되고 싶어서 아니었습니다. 일제시대 만주에서 태어나 교도관을 꿈꿨지만, 한국전쟁 남쪽 노동당 활동을 하다 사라진 할아버지를 탓에 꿈은 좌절됐습니다. 결국 태어난 딸을 위해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하고 광산촌에 정착하게 됩니다.
원하지 않던 삶을 살게 그는 노동조합 활동에서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민주화 이전, 형식적인 조합이었지만 그곳에서라도 일터에 작은 변화를 만들려 했던 젊은 광부는 점점 조합 활동에 열정을 쏟았고, 1987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양양 광산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접선거 조합장으로 뽑혔습니다.
언뜻 보면 남성 중심의 이야기 같지만, 작가는 문학작품들을 통해 광산에서 여성의 존재가 얼마나 지워져 왔는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지상의 선별작업장에서 일하며 성희롱에 시달렸던 여성 직원들, 생계를 책임졌던 어머니들, 비리 폭로에 결정적 역할을 사무실 여직원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동안 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급격한 쇠퇴와 생존의 몸부림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광산업은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임금 삭감을 걱정한 노동자들은 처음엔 교대근무 폐지에 맞서 싸웠고, 나중에는 폐광 현실적인 보상을 받기 위해 가장 위험한 갱도 깊숙한 곳에 스스로를 가두는 투쟁까지 벌였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철광석의 90% 이상을 생산하던 양양 광산이 1995년 문을 닫자, 지역 전체가 쪼그라들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보다 앞서 실직의 아픔을 겪은 작가 가족은 수도권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중산층이라 생각해도 실제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중년에 담배를 끊은 아버지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광물을 캐다 목숨을 잃은 동료의 시신을 맨정신으로는 차마 수습할 없어 술을 마시고 갱도에 들어가야 했던 광부들. 진폐증 보상제도가 생겼지만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곳으로 흩어져 소식조차 없는 산업재해 피해자들.
과거에 머물지 않는 시선
작가는 과거의 기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인력난에 시달리면서도 자격 없는 외국인 노동자를 선뜻 받아들일 없는 2020년대 광산촌의 현실, 여러 폐광 지역의 오늘날 모습을 조명합니다. 예술로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는 지역 극단을 소개하기도 하고, 노동 현장과 동떨어진 정치권의 구호도 비판합니다.
몇 전, 방송에서 경북 봉화 광산 사고에서 살아남은 광부가 출연해 감동을 줬습니다. 사고로 나라가 슬픔에 잠겨 있던 시기여서 더욱 희망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말합니다. “개인의 능력으로 살아남은 이야기는 안전사고를 막지 못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삶의 교훈 정도로만 소비할 위험이 있다”고.
이 책은 단순히 가족의 역사나 사라진 산업에 대한 기록이 아닙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이들의 삶,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노동의 문제를 우리 곁으로 끌어옵니다. 640쪽의 기록은 무겁지만, 반드시 들어야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